← back to list

2018.11.19.(Mon)

소리 이후의 음악 - 오민 작가와의 대화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 것은 아주 작은 균열들을 발견했을 때였다. 뒤틀린 오선보가 그려져 있는 캔버스, 작곡가가 쓴 『읽기 위한 음악』이라는 책, 침묵하라는 단어만이 적혀있는 악보, 「보는 의성시」라고 하는 음악인지 미술인지 알 수 없을 어떤 지면,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되면 연주를 시작하고 생각이 다시 시작됐다면 연주를 멈추고 생각 없음의 상태를 유지하라는 기이한 지시문까지. 그러니까 만약 이 캔버스와 악보와 지면과 지시문을 음악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음악을 눈으로도 볼 수 있고 읽을 수도 있고 침묵하면서도 들을 수 있고 순수하게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로 무언가를 연주할 수도 있다는 것이겠다.

음악을 묘하게 긴장시키는 이 대상들을 한낱 장난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어떤 의심이 피어올랐다. 혹시 이것들이 음악의 핵심에 더 가까워지려는 지난한 시도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음악에서 탈락한 부스러기가 아니라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의 결정체일 수도 있지 않은가. 미술가 오민의 경우를 보자.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 연주의 순간들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장면, 연주자의 몸을 거쳐 다시 만들어진 악보, 인식을 훈련하기 위한 연습곡, 공연이 되는 연습, 공연에서 보이지 않았던 순간들을 끄집어내어 구성(compose)하는 무대. 음악과 음악 아닌 것들,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이 뒤섞이고 교차하는 오민의 세계에서 ‘음악’이란 무엇일까.

ABA(2016) 안무, 퍼포먼스: 아케미 나가오, 사운드 디자인: 홍초선, 두산갤러리 지원

신예슬 음악은 일반적으로 ‘시간을 바탕으로 한 소리예술’로 정의됩니다. 하지만 저는 음악이 반드시 소리여야 할까라는 의문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소리예술이라는 음악의 이 일반적인 정의를 무효화한 채 음악에 관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저는 작가님의 작업이 단순히 음악을 소재로 사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음악이 아닐 이유가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음악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생각하고 계신 그 음악이 작업과는 어떻게 연계되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오민 최근 제가 음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소리는 진동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단위 시간당 진동수에 따라 음높이가 결정되고, 두 가지 다른 진동 수의 음이 울렸을 때 그 파형이 얼마나 충돌하느냐에 따라 이 두 음의 관계가 결정됩니다. 선법, 장단음계, 온음음계, 12음음계와 같은 음의 사용 체계나, 모노포니, 폴리포니, 호모포니와 같은 음의 조직 방식 모두, 기본적으로 음과 음의 관계를 묻습니다. (서양) 음악의 구조는 주제와 주제가 발전된 것 간의 관계로 구성되며, 주제 선율을 구성하는 음이 어떠한 관계로 조직되느냐가 이 주제가 발전하는 방향의 단서가 됩니다. 음악이 무엇이지 질문하신다면, 저는 ‘소리의 관계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소리와 관계 중 소리보다는 추상적 관계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달걀보다 닭이 먼저라고는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 저는 달걀에 더 관심이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음악이 소리를 다룬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소리에 관심이 덜 가는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음악의 재료인 소리가 목소리에서 악기 소리로, 악기 소리에서 구체적인 소리로 확장되었고, 확장을 거듭하다가 침묵도 소리라는 의견이 받아들여진 지도 이미 오래전입니다.

신예슬 네. 여전히 많이 회자되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대표적인 경우라 봅니다. 케이지는 악보에 ‘tacet’이라는 단어, 즉 침묵이라는 단어를 적어둠으로써 작곡가와 무대와 악보와 연주자가 존재하는 음악 전통 안에서 침묵을 귀 기울여 들어보도록 했죠. 이것이 일반적으로 음악에 기대하는 바와 다를지언정 침묵이 음악과 소리에서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는 점은 말씀하신 것처럼 논의가 시작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오민 그렇게 생각하면 현시점에서 ‘음악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보다, ‘소리란 무엇인가’, 혹은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침묵이 소리라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보는 것으로 관계를 감각함으로써 (상상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있다면, 저의 영상 작업도 음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제 영상은 분명히 소음 같은 소리를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이미 현대음악의 역사에서는 오래전에 구체음악이 소음을 음악으로 포용했는데, 그중 피에르 쉐퍼의 초기작품 <기차연습곡>(Études aux chemins de fer)의 도입부에서 경적소리가 울리고 그다음에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리는 부분이 저에게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이 구성은 음악적이고 추상적인 선택이 아니라 움직임의 발생 순서를 반영한 것이고, 구체적인 현상에 대한 관찰이 음악의 구조에 노골적으로 관여한 것입니다. <기차연습곡> 같이 연속된 움직임이 만들어낸 소리를 엮은 것 역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제 영상에서 구성된 움직임이 만들어낸 소리 역시 음악이 될 수 있겠죠. 물론 이런 식으로 개념을 확장하다 보면 모든 장르의 경계가 모호해져 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저에겐 미술가라는 확실한 정체성이 있어요. 다만 제가 만드는 작업들이 음악이 아니거나, 혹은 무용이 아니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신예슬 음악이 주제를 만들고 그 주제를 구성하는 관계성을 토대로 주제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 대한 것이라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런 음악의 전개 방식은 실제 작업 과정에도 반영될까요?  

오민 작곡가의 방식과는 다르겠지만 저 역시 먼저 재료를 생각하고, 그다음 구조를 생각하면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작곡이 대체로 음 소재에서 출발한다면 제 작업은 일종의 질문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다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열렸던 전시 ‘연습곡’은 ‘인식을 어떻게 연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 질문은 ‘인식은 결국 보는 행위와 연결된다’, ‘무엇을 보는가’,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이 여러 방향으로 파생되는 다른 질문과 가정으로 연결되며 발전됐습니다. 재료로서 ‘음 소재’와 ‘질문’은 언뜻 결이 매우 달라 보이지만 추상적 관계를 맺으며 점점 큰 구조의 윤곽을 잡아간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유사해 보입니다. 구조의 큰 틀은 발전된 질문들을 토대로 만들지만, 그 구조의 세부는 공연자와 함께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눈과 귀로 들어야 하는 컴포지션을 머릿속 추측만으로 만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공연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결정적인 디테일이 너무도 달라집니다. 깊은 생각에 빠졌을 때 어떤 사람은 눈을 이리저리 활발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추적하고 어떤 사람은 한 곳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처럼 단순한 행위 하나도 그 사람의 기질, 사고방식, 몸에 축적된 움직임에 따라 보이는 결과값이 천차만별인데, 실제 수행하는 사람 없이 가정만으로 시각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추상적 관계와 논리로 작곡되는 음악의 경우 연주할 몸 없이 만드는 것이 상대적으로 가능하다고 가정할 수 있겠지만, 최근에는 음악 역시 몸 없이 완성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신예슬음악의 경우, 작곡 단계에서 연주자를 관찰하고 연주자와 함께 구조를 만들어가는 사례는 상당히 드문 것 같습니다. 연주자가 창작을 촉발시키거나 작품을 교정하거나 작곡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보통 연주자는 사후적으로 그 작품을 연주하는 일종의 매개자가 되기 때문에, 창작단계에서 공연자와 구조를 함께 짠다는 것이 음악의 관습에서는 다소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입니다. 몸과 함께 작품의 구조를 짜게 되면 공연자들이 이미 다 결정되어 있는 작품을 공연하는 것보다 한결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공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민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머릿속에 그렸던 구조가 실제 몸을 거쳤을 때 무엇이 나오는지를 보기 전에 그것을 과연 어떻게 납득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동시대 무용가들을 통해 몸이 재료로서 작품에 관여하는 한, 그 몸이 어떤 방식으로든 창작에 관여하게 된다는 것을 배웠어요. 2016년에 제가 함께 작업했던 무용가 아케미 나가오는, 무용의 실질적 동작이나 현장에서 개입하는 즉흥적 요소는 이제까지 축적된 무용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지식에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무용가를 교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무가와는 함께 작업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작곡된 음악이 여러 연주자를 거치며 달라지는 것을 보는 것도 상당한 즐거움인데 그걸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다양한 공연자들과 협업 해오는 동안 나가오의 말이 납득되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협업이라는 것은 정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므로 저도 아직 어떤 정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무용에 비해 음악에서 연주자에 대한 고민이 다소 간과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작곡가와 연주자의 관계가 저에게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공연의 아이디어에 잘 맞는 몸을 찾아, 그 몸에 기반하여 완성된 작품을 보게 되면, 관객 역시 그 공연이 추구하는 어떤 최대치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 그 최대치를 본다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신예슬 <이영우, 안신애, 그리고 엘로디 몰레>의 경우 연주자의 몸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 세 인물은 각각 다른 행동을 하지만 모두 일종의 연주자로서 음악적인 움직임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영우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안신애가 노래하고 엘로디 몰레가 무술을 하는 이 작업의 구조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오민 이 작업은 세 종류의 연습에 대한 관찰입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매체로 사용했지만, 어떤 음악을 연습하는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래는 연습의 첫 단계, 음악 분석에 관한 얘기에요. 연주자들은 연습의 초반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음악을 해석합니다. 음악에 대한 아이디어 없이 몸으로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안신애의 노래는, 주제 멜로디, 화성 변화, 베이스 변화, 왼손과 오른손의 구성 등을 분석할 때 머릿속으로 부르는 노래를 실제로 실행한 것입니다. 엘로디 몰레의 수박도 수행은, 연주자들이 어떤 소리를 내기 위해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연구하는 과정을 무술가가 정확한 동작을 수행하는 것에 대응한 것입니다. 이영우의 피아노 연주는, 연주자들이 자동적으로 몸에 익을 때까지 되풀이하는 반복 연습입니다. 영상의 세부적 장면 연결과 구조는 미리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장면들을 각각 좌측-정면-우측, 와이드-미들-클로즈업 이렇게 아홉 가지 다른 앵글로 찍은 다음, 그중 연주가 가장 좋은 장면들을 선별하고 서로 연결하여 최종적으로 음악의 편곡을 완성했습니다. 연주에 따라서 세부 구조가 결정된 거죠. 그렇게 몸을 통과하여 영상으로 완성된 음악을 다시 악보로 옮겨보았는데 애초에 쇼팽이 결정한 박자로부터 어긋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행동을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됐죠. 행동을 기록하는 대표적인 예가 무보일텐데요, 그간 많은 무용가들이 춤을 정확히 기록하는 갖가지 방법을 시도했지만 보편적으로 쉽게 소통할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고 기록하는 것도 어려우니 머릿속 논리만으로 춤을 만들고 기록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악보와 무보의 차이를 인식한 이후부터 작곡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연주자의 몸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하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예슬 연습에 대한 관심은 연습을 ‘곡’이 아니라 ‘공연’의 차원으로 확장하려는 최근의 연작 <연습연>까지 확장됐습니다. 연습은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이고 연습의 목적은 보통 공연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연습연> 작업에서는 연습과 최종, 과정과 완성의 관계가 모호하게 뒤섞이는 것인데요, 어떻게 해야 연습을 공연으로 볼 수 있을까요?

오민 그것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공연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공연에서 무엇을 보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공연을 볼 때 보고자 하는 그 ‘무엇’을 연습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면, 연습도 공연이 될 수 있겠죠?

신예슬이제까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만 실제로 공연에서 이것이 최종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감각을 받은 적도 꽤 많습니다. 어떤 곡이 초연되는 현장에 가보면 이 공연이 그간 준비해온 것의 종지부를 찍는 것 같아 보여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고 더 길게 이어질 어떤 여정의 일부를 경험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차라리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에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고요.

오민 초연되는 공연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영상이든 공연이든, 완전한 완결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영상의 경우도 편집을 종료하는 순간은 편집실 내 모니터를 통한 경험에 기반한 것일 뿐이고 여전히 전시장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영상이 투사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실제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영상 전시 설치가 완료된 이후에도, 이것이 다른 공간에서 또 다르게 보일 것을 알기에 여전히 완결감은 한정적입니다. 영상이든 공연이든, 재상영/재공연 되기를 기대한다면, 언제든 재편집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듭니다. 조금 다른 측면으로, 보통 작업은 몇 가지 질문에서 출발하는데 작업이 한참 진행되고 완료에 거의 도달해 있는 순간, 관련된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물며 쏟아져 새로운 문을 열어놓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완결감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신예슬 그 끝나지 않는다는 감각이 답답하거나 그렇진 않으신지요.

오민 물론 답답합니다. 하지만 완결을 바란다고 해서 완결될 수 없는 것이 완결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고, 답답함에 익숙해졌습니다. 어쩌면 미완결의 아쉬움이 다음 작업으로 이동하는 속도감을 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 답답함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완결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완벽에 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요, 비슷하면서도 참 다른 개념 같습니다. 완결은 작가로서 더 많이 생각하고, 완벽은 고전 음악 연주자 시절에 조금 더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 연주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잠정적 결론은, 연주자는 문헌(일종의 조건)을 받아서 분석하고 해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예전엔 문헌을 잘 분석하는 것이 어떤 목표였고 그것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어요. 특히 고전 음악은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 순간이 너무 투명하게 드러나니까요. 이때는 수행을 ‘구현’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어느 순간 수행을 구현이 아닌 ‘반응’이라고 바꾸니 조금 긴장이 풀리더군요.

신예슬 ‘반응’이라는 표현은 정말 훨씬 편안하네요. 가끔 저도 무의식적으로 연주자가 하는 일을 전달자의 역할로 묘사할 때가 있어서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수행, 매개, 실현, 구현, 전달 같은 단어들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쓰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런 부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관념들이 연주자에게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완벽성에 대한 긴장감을 주는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민 그러다 음악에서 미술로 넘어오면서, 혹은 고전에서 동시대로 그 관심을 바꾸면서, 완벽에 대해 조금은 다른 태도를 경험하게 됐어요. 실수까지 포용하는 여유랄까요. 때때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을 낡은 것, 구태의연한 것,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 보는 시선 또한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완결과 완벽을 믿지 않는 것과 그것을 부정하거나 기피하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고 생각하고, 저는 완결과 완벽을 지향합니다. 다만 제가 지향하는 완결과 완벽은 고전 음악이 추구하는 완결과 완벽성과는 다른 것이고, 이 역시 고정되지 않고 늘 변할 것입니다.

관객(2017) 안무: 이양희, 사운드 디자인: 홍초선, 퍼포먼스: Becca Loevy, Burr Johnson, Lauren Newman, Micayla Wynn, Owen Prum, 두산갤러리, 서울문화재단 지원

신예슬작업의 소재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 볼까요. 공연 이전에 이루어지는 사적 행동인 연습이 <연습곡> 작업에서 무대화되고 주요한 관찰의 대상이 됐다면, 한편 <관객과 공연자>에서는 관객도 관찰의 대상이 되고, <마리나, 루카스, 그리고 나>에서는 연주자의 집중하는 표정이 전면에 드러납니다. 모두 음악을 둘러싼 상황에서 발생하는 일들이지만 주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주변적이거나 사소한 순간에 가깝게 여겨져왔던 요소들인데요. 이것들에 매력을 느끼고 작업의 소재로 삼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오민 악기 연주에서 디테일을 관찰하고, 그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주에서 디테일은 절대 사소하거나 주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모습’이 ‘소리’에 가려졌을 뿐이겠죠. 피아노 연주에서는 손가락 끝이 피아노에 닿는 그 느낌을 가지고 소리를 조절하기도 하는데, 건반이 직접적으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건반, 해머, 현과 같은 몇 가지 기계 장치를 거치는 것을 감안한다면 건반을 누르는 예민한 감각으로 소리를 예상한다는 것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지나쳐 버리는 그런 작고 민감한 부분을 조정해보는 게 연습 과정에서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미세한 움직임에 대한 감각은 저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것이에요. 보통 작업을 할 때 큰 구조부터 잡고 세부사항을 잡아가는데, 평소 잘 보지 않는 부분까지 세부적으로 들어갔을 때 어떤 기시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은 움직임이 달라졌을 때 만들어내는 차이가 분명히 보이니까요. 저는 연습의 과정에서 섬세한 차이를 발견하는 경험이 흥미진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누구도 연습하는 그 지난한 과정을 견뎌낼 수 없겠죠. 연습은 지루한데 참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게 디테일을 파는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입니다.

신예슬개인적으로 연습에 대한 기억은 아름다움보다는 괴로움에 가까웠습니다. 원하는 수준으로 곡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답답했던 마음, 몸에 충분히 익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좌절감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실은 그건 ‘완성’이라는 목표지점을 상정했기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연습을 완성이 아니라 조금씩 달라지는 변화나 섬세한 차이를 발견하는 것으로 여겼더라면 음악에 대한 많은 생각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연습의 아름다움을 그때도 느낄 수 있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오민 반면 제가 이제 더이상 연주를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명확하게 보이는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당시에는 소리만을 생각하면서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분명 내 몸이 움직여서 난 소리들일텐데 몸에 대한 감각이 희미했다는 것이 믿기 어렵기도 합니다. 현재는 소리 자체보다 소리를 만드는 연주자의 물리적인 신체와 행위, 그리고 몸이 움직이고 있는 동안 머릿속 상황 등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연주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신예슬그런 디테일한 장면을 잡아채고 관찰하는 데는 영상이라는 매체가 단연 적합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가까이서 샅샅이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으니까요.

오민 그렇죠. 카메라 앵글뿐 아니라 편집의 역할도 큽니다. 영상에서의 편집은 시간의 구조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디테일의 관찰은 비단 공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신예슬작업의 결과물은 영상뿐 아니라 퍼포먼스와 스코어로도 만들어집니다. 어떤 형태로 보여줄 것인가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소재에 따라 가장 적합한 매체를 선택하시는 것이겠죠?

오민 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업 같은 경우는 작곡가 줄리아 울프의 <릭>(Lick)에서 출발했고, 공연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에요. 처음 이 음악을 실연으로 들었을 때 이상한 감각들을 느꼈는데, 그 감각을 유발하는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주제(주재료)를 어떻게 선택하고 또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 ‘얼마나 미리 결정하고 얼마나 즉각적으로 결정하도록 열어둘 수 있는지’, ‘공연자들은 시간을 어떻게 공유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이 쏟아져나왔어요. 비단 이 음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공연을 만들 때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질문들이죠. 추적을 하면 할수록 이런 질문들은 <릭>이라는 음악이 관습과 탈관습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 작업에서도 어떻게 관습적, 탈관습적 재료들에 대응할지 고민했습니다. 이때, 감상과 관련된 대표적인 관습 중 하나인 ‘무대’라는 개념이 제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무대의 해체는 다른 작가들 역시 이미 여러 각도에서 시도하고 있지만, 고전 음악에서 ‘무엇’도 중요하지만 ‘어떻게’가 (어쩌면 더) 중요했던 것처럼, 무대를 확장할 수 있는 어떤 다른 흥미로운 관계와 그 구성이 가능한지 실험해 보고 싶었어요.

신예슬근본적으로 <릭>을 듣고 느꼈던 감각에서 출발한 질문들이긴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도달한 무대라는 개념에 대한 실험과 <릭>이라는 한 구체적인 작품의 접점은 이번 작업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오민<릭>의 주제는 단번에 주제같이 들리지 않는데, 주제 같이 들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주제가 주제같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가 궁금해졌고, 어느 순간 무대 안에 있어야 하는 것과 밖에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되었어요. 나아가 공연 제작에 관여하는 사람들과 역할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보통 공연이 올라가기 직전까지 연출자가 공연을 이끌어 가지만, 공연이 시작하는 순간 연출자는 관객과 같이 그 공연이 수행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연출자의 보는 행위와 관객의 보는 행위는 어떻게 다를까요? 수행자들 중 일부는 무대 위에서 보이도록 수행하고, 또 일부는 분명 수행 중이지만 무대 밖에서 최대한 보이지 않도록 움직이기도 합니다. 보이는 수행과 보이지 않는 수행은 어떻게 다를까요? 혹은 같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장에서 발생하는 신체성입니다. 공연을 보기 전에 <릭>을 음원으로 들었지만, 처음 실연을 보았을 때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제가 느낀 감각을 증폭시킨 것은 연주자들의 신체였다고 생각해요. 더 자세히 말하면, 자연스럽게 음악에 몸을 맡기며 연주할 수 없어 최고의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신체의 아름다움, 혹은 그 신체가 발생시키는 에너지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장에서 발생하는 그 긴장간과 긴급함이 재료여야 했어요.  몇 달 동안 반복 재생되는 영상의 경우 제작에 관여한 사람들이 영상을 상영하는 시간과 장소에 늘 함께하기 기대하기 어렵지만,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제작 관련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주변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게 관객으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무엇을 보이고 싶고, 무엇을 보이지 않고 싶은지, 보이고 싶지 않지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인지, 보이고 싶지만 보이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지 실험하기 위해 이번 작품은 공연의 형태가 되어야 했습니다. 영상은 원한다면 감출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으니까요.

신예슬이 공연은 어떤 형식으로 구성될까요?

오민 서양 고전음악은 대개 가장 먼저 주제를 제시하고, 이를 발전시키고, 다시 주제를 상기시키는 구조를 기본 골자로 합니다. <릭>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 재즈의 기본적 구조 역시, 연주자에 의해 발전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달라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저도 이번 공연에서 유사한 구조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일단 모든 것에 앞서서 주제를 들려줄 예정인데 주제는 바로 연주자들이 줄리아 울프의 <릭>을 연주하는 파트 A입니다. 이어지는 파트 B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전환’이라고 불리는 기술적인 부분으로, 무대감독과 스태프들이 무대로 나와서 파트 A의 연주에서 사용되었던 피아노, 보면대, 마이크와 같은 악기, 장비를 옮기거나 해체하고 무대에 일렬로 정렬하며 파트 C를 위한 장면으로 전환할 예정입니다. 원래 전환은 뛰지 않는 가장 빠른 속도로 최소한의 시간을 목표하며 따라서 모든 동작이 효율에 의해 자연스럽게 안무되지만, 이번 공연에서 파트 B의 안무는 비단 효율만으로 안무되지는 않을 예정입니다. 파트 C는, 말하자면 <릭>의 발전부입니다. 재즈 연주자들이 주제를 즉흥적으로 발전시킬 때 주제가 마치 사라진 것처럼 들릴 정도로 주제로부터 먼 거리를 만들기도 하는데요, 이 공연의 파트 C 역시 <릭>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여전히 <릭>을 한 발로 밟은 채 다른 한 발을 최대한 멀리 밟아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다른 한 발을 어디로, 어떻게 밟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테크니컬 리허설의 개념을 빌려왔습니다. 보통 테크니컬 리허설은 극장 셋업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 공연을 부분적으로 실행하고, 연습하고,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파트 C는 <릭> 음악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한 공연의 테크니컬 리허설이라는 가정하에, 실제와 새로운 가정이 서로를 교란하도록 설정했습니다. 음악 소리는 사라지고, 이 음악의 개념 속에 있었지만 평소에 들을 수도 들을 필요도 없는 소리들이 첨가 되었을 뿐 아니라, 원래의 음악보다는 이렇게 새롭게 발생한 소리와 상황에 훨씬 더 긴밀하게 연결된 행동들, 예를 들어, 무대와 무대 밖을 돌아다니면서, 조명-사운드-액션 등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들을 체크 하는 행위가 주요한 재료로 등장합니다. 보통 테크니컬 리허설에서는, 공연 제작진들이 무대의 밖에서 무대 안을 보지만, 파트 C에서는 이미 무대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마치 반쯤 뒤집어져 안과 밖이 동시에 보이는 말린 양말 한 켤레처럼, 무대의 안과 밖이 서로 섞여 서로를 침범할 것입니다.

신예슬사람들이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오퍼레이터들이 무대를 세팅하고, 테크니컬 리허설 많은 것들을 미리 체크하는 행동들은 사실 공연을 중심으로 항상 존재해왔지만 우리가 관찰하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실제로 공연의 인터미션 저희는 늘상 그런 장면을 있고요. 그런 면에서 이번 작업의 구조는 <> 주제가 생략된 주변부, 연결구 같은 것들로 구성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것과 굉장히 일맥상통하는 듯합니다.

오민 이번 공연의 구성은 작업 초반에 설정한 것들인데요, 일차적인 감각에 의존한 판단이었기 때문에 리서치 진행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걸 각오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리서치를 하면 할수록 이 공연의 구성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더해졌어요. 운이 좋았다거나 제가 비상한 아이디어를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라, <릭>이라는 음악이 이성적으로는 혼란을 주는 가운데 감각적으로는 매우 명확한 소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신예슬제가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던 책 중 『뮤지킹 음악하기라는 책이 있는데, 저자인 음악학자 크리스토퍼 스몰은 음악을 작품 단위로 접근하지 말고 행위로 접근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music’이 아니라 ‘musicking’이라는 동명사 형태의 단어를 제시하며 음악적인 행위는 단순히 곡을 연주하거나 듣는 것뿐만 아니라 공연 티켓을 산다거나 심지어 공연장을 청소하는 것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논의를 이끌어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업에서는 공연을 둘러싼 모든 일련의 음악적 행위들이 무대에 올라가 웅성거리고 교차하는 그런 묘한 광경이 펼쳐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무대라는 기점을 중심으로 공연의 시간이었던 것과 공연이 아니었던 시간이 한데 중첩되는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하고요.

오민또 하나 중요한 점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드러내는 그 자체보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도 구성(compose)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았던 행위들은 대개 수행해야 하는 것들의 흐름을 따라 일련의 사건처럼 자연스럽게 구성되어 왔을 텐데, 저도 이 맥락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 행위가 ‘조형적으로 어떻게 보이는가’, 서사가 없는 행위들을 ‘어떻게 기억시키면서 생경하게 할 수 있는가’,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가’,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가’도 함께 고민 중입니다. 결국 이 공연은 ‘구성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으로 연결되고 있고, 현재 조형, 인과, 몸, 맥락, 역할, 무대의 안과 밖, 추상적 구상적 관계 등 다양한 구성 방식을 수집 중입니다.

신예슬그 부분 역시 <릭>의 음악적 구조와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관객으로서 파트 A가 지나고 <릭>이 사라진 상태에서 파트 B를 거쳐 C에 도달했을 때, <릭>의 한 순간을 회고하거나 다시 경험하는 듯한 순간을 얼마나 많이 발견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오민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작년 4월에 이 곡을 처음 듣고 ‘대체 이 음악의 정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여기까지 끌고 온 그 1년 반의 시간이 약 40분 안에 축약되는 셈일 텐데요, 파트 B, C로 이어지면서 파트 A에서 음악을 들으며 순간적으로 느꼈던 어떤 감각을 잠깐잠깐 다시 마주하기 바라지만 관객을 위해 작품 속에 ‘파트 A의 감각 재회 설명서’는 첨부하지는 않을 계획입니다. 감각은 설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감각은 구조와 구조가 만든 관계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더 선명한 감각을 만들기 위해서 더 선명한 구조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 작업을 보고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무용가들은 춤은 보는 즉시 사라진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사라짐’은 사실 시간을 다루는 예술 모두에 적용되는 말인 것 같아요. 내가 기억한 것과 내가 현재 보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내가 앞으로 볼 것을 적극적으로 구성하면서 보지 않으면 불분명한 기억의 파편 속에서 헤매는 것만 같고, 그래서 까다롭고, 또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무엇인지 명쾌하게 기억하거나 설명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감각적으로는 많은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번 공연이 그런 공연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예슬<릭>에 관한 이번 작업이나 <연습연>처럼 꼭 음악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작업이 아니더라도, 작가님의 몇몇 작업들에서 종종 ‘음악적이다’라는 감각을 받습니다. 그 감각의 기원이 어디일까요? 영상은 결국 시간을 구획해야 하는 것이니 그 감각은 결국 리듬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걸까요?

오민앞에서 음악은 소리의 관계라고 얘기했는데 그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는 반복, 대응, 대비, 대조, 확장, 축소, 부분, 전체, 생략과 같은 조형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보통 제가 영상에서 사용하는 실제적인 재료의 최소단위는 결국 ‘몸과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소리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과 유사한 언어로 이 몸과 움직임의 장면들을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실제로 영상을 편집할 때 마치 연주자가 한 음을 수백 번 치며 음의 길이를 미묘하게 조절하듯 연결 장면을 수백 번 보면서 미묘한 시간의 박을 고려하기도 합니다. 안단테의 느림을 결정하는 감각, 포르테의 강함을 결정하는 감각, 리타르단도의 변화를 결정할 때의 감각에 대한 기억이 편집할 때도 반영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씩 영상을 편집하는 동안 연주하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신예슬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질문은 저의 아주 오래된 궁금증이기도 합니다. 듣지 않고 보는 것, 움직이는 것, 읽는 것,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음악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오민음악은, 결국 반복이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단순히 반복되기만 한다면 지루하겠지만, 변하면서 반복되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변했는가는 결국 어떠한 관계를 만드냐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관계를 만드는 과정을 음악에서는 ‘발전’이라고 부르고, 발전의 방향은 무궁무진합니다. <La Folia>라는 동일한 멜로디로 수많은 작곡가들이 수많은 다른 음악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테고요. 반복과 발전의 관계를 인지할 단서가 잡히지 않을 때 음악이 난해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 관계를 인지하고 납득하는 순간 느끼는 희열은 정말 짜릿합니다. 저는 반복(때로는 반복을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합니다.)과 변화, 그리고 그 변화의 거리와 방향을 인지하는 그 순간이, 혹은 당장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인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생하는 순간이, 음악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이 의견에 동의한다면, 반복-변화되며 거리와 방향의 관계를 만드는 대상이 비단 소리가 아닌 행위나 형태 등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되더라도, 이것이 여전히 음악의 언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반복은 주로 수평적으로 흐르는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음악은 시간예술이므로 시간과 함께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의 범위 안에서 선형적으로 흐르지만, 이 단면을 이리저리 잘라보면 선형적이라고만 얘기하기 어려운 수직으로 또는 비스듬하게 얽힌 흥미로운 내부 구조를 보게 됩니다. 보통의 언어는 이렇게 복잡한 관계를 선형적으로 하나하나 풀어나가려는 습성이 있지만, 음악의 언어는 이를 반드시 선형적으로 차례차례 풀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며 동시다발적이거나 순서가 필요치 않은 흐름을 만들곤 합니다. 한 방향이 아니라 양방향, 다방향, 역방향 등으로 흐르고 또 정지하기도 하고요. 저는 이런 복잡다단한 사유의 방향성을 음악적 사고, 혹은 다이어그램적인 사고라 부릅니다. 음악이 선형적인 동시에 비선형적일 수 있는 것은, 읽을 때와 볼 때와는 달리 들을 때는 여러 가지 다른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 번에 보이지 않는 개별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낼 때, 보이는 하나로부터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를 분리하여 인지할 때, 저는 이 역시 음악적인 순간으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작업 <강진안, 공연화, 김민정, 김성완, 배기태, 슬기와 민, 신예슬, 신진영, 심우섭, 오민, 이신실, 이양희, 이영우, 이태훈, 장태순, 정광준, 조세프 풍상, 한문경, 허윤경, 홍초선,>은 11월 24일(토) 오후 6시, 11월 25일(일) 오후 3시에 아트선재센터 아트홀에서 공연된다. 인터뷰에서 밝힌 이 작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공연 후에 다시 업데이트될 예정이다. (www.artsonje.org/performance_min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