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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8.(Thu)

현대음악의 악보 – 문석민 작곡가와의 대화

피아노 연주자는 건반 표면을 손톱으로 훑고, 바이올린 연주자는 활을 다급하게 긁어대고, 클라리넷 연주자는 있는 힘껏 숨을 불어넣어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소리를 내고, 플루트 연주자는 소리가 음이 되지 못하도록 납작한 입김만을 불어 넣고, 성악가는 말하고 웃고 소리지르고, 타악기 연주자는 악기 대신 박수를 치며 무대를 걸어 다니고, ‘물’을 연주한다. 공연장에는 기차 소리와 파도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시간 어딘가를 떠돌던 라디오 전파가 흘러들어온다.

다섯 개의 수평선과 네 개의 공백으로 이루어진 오선보는 음정을 반음 간격으로 적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평균율로 조율된 12개의 음을 적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이 기보 체계가 현대음악이 포용한 수많은 소리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새로운 기호를 무한히 추가하거나, 그림을 그려 넣거나, 때로는 악보로 기록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의 역사가 오랫동안 다섯 개의 선 위에 놓여 있던 탓에 오선보에서 사용되던 기호들은 여전히 현대음악의 기록 시스템을 굳건히 지탱한다. 작곡가는 여전히 오선보를 펼쳐두고 음악을 써내려가고, 연주자는 여전히 오선보 위에 적힌 기호들을 소리화한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오래된 악보에서는 현대음악이 포용한 새로운 소리들이 대체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신예슬 오늘날 현대음악 작곡가에게 곡을 쓴다는 건 결국 악보를 완성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합니다. 연주라는 과제가 남아있지만 작곡가 선에서 최초로 작업을 한차례 완성하는 순간은 악보의 마지막에 끝세로줄을 그려 넣는 때이지 않을까 싶고요. 현대음악 작곡가들에게 언제나 궁금한 점은 대체 머릿속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길래 이렇게 복잡한 악보가 만들어지는가입니다. 눈으로 악보를 봤을 때 느껴지는 복잡성과 소리의 복잡성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적어도 작곡가가 소리를 상상한 과정이 그만큼 정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문석민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하지만 악보를 복잡하게 그리는 게 과연 효과적인지에 대한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어요. 저 자신도 작품을 만들면서 악보에 지시문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넣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이게 내가 원하는 소리를 잘 구현하는 것인지, 불필요하거나 부적절하진 않은지 다시 생각해보곤 해요. 복잡한 악보가 소리에 대한 정교함을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리게티의 <Atmosphères>와 펜데레츠키의 <Threnody to the Victims of Hiroshima>는 거대한 클러스터 음향을 낸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기보법을 사용하면서 그 질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신예슬 대부분 아직도 오선보를 사용합니다. 상상한 소리가 오선보에서 통용되는 기호에 잘 담기는지, 마땅한 기호를 못 찾을 때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문석민 기호는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것들을 참고할 수도 있고, 또 기호가 없더라도 이제는 제 마음대로 기호를 마음대로 만들어 쓸 수 있으니까 생각보다 큰 문제는 아니에요. 제 의도와 비슷한 걸 찾아서 하면 되고, 또 악보 앞에 매뉴얼을 주고 거기서 충분히 설명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사실 기호 찾는 것보다는 마음에 드는 서체를 찾는 게 더 어려워요(웃음).

신예슬 그런데 현대음악에서 포용한 온갖 소리를 오선보가 다 포섭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작년 ATM에서 초연한 <Who’s That Knocking at My Door?>는 전화벨 소리나 노크같이 갑자기 찾아오는 소리가 주는 불안감에서 출발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 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음악으로 고스란히 옮기는 건 아니겠지만 그 소리의 특징들을 오선보로 기록해낼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오선보에 어떻게든 구겨 넣다 보면 기록 과정에서 상상했던 소리가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문석민 맞아요. 쓰는 과정에서 달라지기도 하고, 또 어떻게든 써놨다고 해서 그대로 연주에서 구현되는 것도 아니에요. <Who’s That Knocking at My Door?>의 첫 부분에서 저는 불안하게 문을 마구 두들기는 소리를 내고 싶었어요. 근데 악보를 보고 온 연주자는 굉장히 젠틀하게 노크하는 소리를 내더라고요. 잘 안 들린다는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한 거였고 저도 납득해서 연주자의 의견을 따르긴 했는데, 이런 경우처럼 악보만으로는 그 소리를 가늠할 수 없거나 연주할 때 바뀌는 경우가 꽤 많죠. 또 <Saturation> 같은 곡은 첫 부분을 아주 세게 하고 싶었는데, 이걸 어떻게 적을지도 고민을 꽤 했어요. 엄청나게 힘 있는 사운드를 내고 싶었는데 음표를 그려버리면 딱딱해지는 느낌이어서요. 그래서 어떤 기보법이 효과적이겠냐는 고민은 늘 하죠. 항상 작품을 만들면서 악보에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이게 연주자한테 갔을 때가 문제인 것 같아요.

신예슬 연주자들이 겁먹을 것 같은데요.

문석민 그건 이해해요. 안 해본 거니까. 그리고 제가 설명할 수 있으면 괜찮아요. <Saturation> 같은 경우 한국에서 초연 준비할 땐 제가 리허설에 참여해서 주법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고 어떤 소리를 상상한 건지 얘기를 잘 나눠서 결국 연주가 잘 됐었어요. 근데 이 곡을 또 여기저기 냈었는데 러시아에서 열린 어느 콩쿠르 파이널에 올라가서 연주가 된다는 거예요. 그땐 직접 갈 수가 없으니까 악보만 보냈죠. 나중에 연주했던 동영상을 보고 조금 충격을 받았어요. 악보에 적은 매뉴얼대로 구현이 안 된 것이 꽤 많더라고요. 연주한 앙상블은 나름 현대음악 전문 단체여서 음원도 안 보내고 악보만 보냈었는데, 작곡가와 대면하지 않는 이상 생소한 주법 같은 것이 온전히 연주되는 것은 불가능한 건가라는 한계를 느꼈어요.

신예슬 악보는 정말 기호 더미잖아요. 확정적인 건 음표밖에 없고요. 그 외 주법이나 음색이나 세세한 표현 같은 것에 대한 공통관습이 무효해진 상황에서 소리의 질감, 느낌 같은 걸 정확히 전달한다는 건 작곡가와 대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 아닐까 싶은데요.

문석민악보에 나름대로 매뉴얼을 상세히 적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안 되니 문제라고 생각했죠. 러시아에서의 그 일 이후로 저도 기보법에 대해서 고민을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현장에 매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없어도 곡 연주가 제대로 되어야 하니까요. 근데 그게 연주자가 제대로 안 읽어준 건지, 제가 충분히 안 써놓은 건지는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작곡가는 악보에 동영상 링크를 적어놓고 생소한 주법을 영상을 통해 설명하는 것을 본 적도 있어요. 그런 식의 대안도 있겠죠.

신예슬 사실 저도 악보를 보면서 음원을 들으니까 이게 악보에 친절히 기보된 건지 불친절하게 기보된 건지 가까스로 가늠하는 거지, 음원만 들었으면 애초에 악보를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악보만 봤었어도 소리를 이렇게까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악보와 음원을 연주자들에게 같이 보내면 실례가 되는 걸까요?

문석민 일단 초연의 경우에는 음원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고, 재연인 경우 보낼 수는 있지만 연주에 대한 특정한 기준을 정해주는 것 같아 연주자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인 경험일 수도 있지만 현대음악에 익숙한 연주자일수록 음원을 요구하지도 않고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으면 꼭 연락을 해요. 작곡가가 자진해서 음원을 보냈다면 어쩌면 스스로 악보에 설명이 부족했다고 느꼈을지도요.

신예슬 애초에 악보를 그렇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전례 없는 기호들도 마구 등장했고, 한 기호와 한 소리가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너무 많아요. 거의 암호문에 가까운 수준인데요.

문석민 저도 다른 작곡가들 악보 보면서 음원 듣고 설명까지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있어요. 어떻게 해서 이 소리가 나는지 절대 파악이 안 돼요. 매뉴얼을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나 독일어 등의 한 가지 언어로만 적어놓는 경우도 더러 있고요.

신예슬 그래서 저는 악보를 보는 것보다 음원을 듣는 게 훨씬 쉬워요. 가끔은 귀로 들었을 땐 소리가 명확하고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악보가 지나치게 복잡한 경우를 보면 혹시 기보체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어요. 오선보에 못 들어가는 것들을 어떻게든 욱여넣으려고 하니까 이렇게 악보가 복잡해지는 것 아닌가 싶고요. 다만 오선보가 적어도 이 장르의 작곡가와 연주자들에게 간편하다는 게 문제죠. 다들 서유럽 전통음악을 배워왔고, 거기서는 이 오선보가 공통의 문자체계니까요.

문석민 맞아요. 오선보가 편하다는 게 제일 딜레마에요. 어떤 작곡가들은 그래픽 기보법을 쓰기도 하지만 그 연주자들은 그 기호들을 이해하기 위해 또 새로 공부를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걸 하더라도 다들 알고 있는 오선보 위에서 하는 게 더 낫다는 거죠.

신예슬 그 연주자는 결국 오선보를 읽어온 세월이 최소 10년 이상은 된, 서유럽 악기의 전공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악기는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건가요? 다른 전통의, 아니면 새로운 악기를 쓸 수는 없을까요?

문석민 새로운 악기에 대한 관심이야 있지만 굳이 억지로 다른 전통의 악기를 섞고 싶진 않아요. 제가 공부하고 좋아한 건 서양 음악인데 다른 악기를 뭐하러 쓰냐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런 이유 없이 다른 악기를 쓰진 않을 것 같아요. 다만 전자음악은 많이 해보고 싶은데 공부가 필요하니까 조금 차근히 접근해보려고요.

신예슬현대음악이 ‘현대성’을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오선보나 악기 같은 면에서는 철저하게 전통에 입각한다는 점이 한편으론 모순적이기도 합니다. 그게 일종의 제한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같은 전통에 위치하면서도 이전의 음악들을 외부자적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곡들, ‘음악에 대한 음악’을 쓰려는 사례가 눈에 꽤 많이 띕니다. 문석민 작곡가의 경우도 소나타 형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Organism> 연작과 플루트의 특성과 음향에서 출발한 플루트 독주곡 <From Air> 등, 어떤 식으로든 서유럽 전통과 연계된 것들이 작품 소재로 쓰입니다. 형식이나 음향이 음악 내부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소재가 되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인데요.

문석민 플루트 독주곡 <From Air>는 추상적인 공기나 바람을 얘기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플루트의 특성이나 그 음향에서 출발한 건 맞아요. 굉장히 자유롭게 쓴 곡이었는데 처음부터 이 제목을 염두에 둔 건 아니고 완성하고 나서 이런 제목을 붙였죠. 여태껏 곡을 아주 많이 쓴 건 아니지만 보통은 평소에 들었던 작품이나 좋아하는 스타일이나 공부했던 것들을 끄집어내고 정리하고, 그 다음에 제목을 정하는 식이었어요. <Organism> 시리즈 같은 경우는 말러나 브루크너의 교향곡에서 느꼈던 소나타 구조에 대한 흥미에서 출발했어요. 이 큰 교향곡들이 굴러가는 이유는 결국 모티브와 소나타라는 형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난잡한 소나타 형식’이 지금의 음악에도 적용되면 재밌겠다 싶어서 쓴 곡이에요. 이 곡은 지금 두 개를 썼는데 하나를 더 써서 세 개의 연작으로 완성하고 싶어요. 한편 그런 게 저에게는 꽤 콤플렉스이기도 해요. 왜 나는 음악적인 이미지로만 곡에 접근하는가. 일종의 딜레마죠.

신예슬 왜 딜레마인가요? 저는 그 부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서 오히려 이런 곡을 그냥 노골적으로 쓰신다고 생각했는데요.

문석민 알다시피 이런 소재로 곡을 쓰는 사람들은 너무 많고,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철학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내 얘기나 내 생각이 들어가야 음악에서 제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결과물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나 자신을 반영하지 못하는 곡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고요. 왜 이런 게 아니면 곡을 쓸 수가 없을까. 그래서 <Who’s That Knocking at My Door?>에서는 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런 점에서 저에겐 특별한 곡인데, 이 곡을 쓸 때는 내 얘기를 잘 표현하기 위해 여태까지 배워온 기술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가 관건이었어요.

신예슬현대음악으로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어렵다는 점은 비단 개개인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어법 자체의 특수성도 있고 또 이 전통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해야 했던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렇다면 <Who’s That Knocking at My Door?> 이후로는 개인적인 얘기를 음악으로 풀어내기가 조금 더 쉬워졌나요?

문석민 시도는 하지만 여전히 어려워요. <Who’s That Knocking at My Door?> 이후 두 개의 작품을 더 만들었는데 한 작품에만 개인적인 얘기를 담을 수 있었어요. <Pulse>라는 작품은 음악적인 이미지로 접근한 곡인데, <Who’s That Knocking at My Door?>에서 주재료가 되었던 ‘두드리는 소리’ 그 자체에 집중해서 음악을 풀어냈어요. 반면 <Vanilla Sky>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곡인데, 최근에 너무 현실과 같은 꿈을 꿔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가끔 있었어요. 심한 경우 제가 어떤 일을 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꿈에서 했던 거였더라고요. 이런 경험과 함께 평소에 제가 가지고 있던 꿈에 대한 이미지를 작품으로 표현했어요. 이외에도 개인적인 얘기를 담고 싶은 작품의 스케치가 몇 개 있는데 이것을 악보로 구체화하는 단계에 이르면 아직도 막히는 부분이 많아요. 그래도 하나는 성공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더 고민하면서 계속 시도해봐야죠.

신예슬얘기를 조금 옮겨볼까요. 현대음악 프로그램 노트를 보다 보면 ‘무엇을 실험해보았습니다’라는 표현들을 굉장히 많이 보게 되는데요. 그런 부류의 음악은 때로 ‘자기 수련으로서의 작곡’처럼 작곡가 개인의 공부를 위해 쓰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정말 음악사적 맥락에서 실험적이라고 할 만한 경우는 거의 없고, ‘저도 한번 해봤습니다’가 많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름대로 소재를 연구하고 스스로 실험해보는 과정에서 많은 배움이 남기는 하나요?

문석민 저 같은 경우는 실험 자체에 목적이 있는 건 아니고 공부가 된다고는 생각했던 것 같아요. <Organism> 같은 경우는 구조에 대한 공부에서 비롯된 작품이고, 이 곡을 한번 쓰면서 구조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까 그 이후에는 구조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안 해도 각 소재와 곡에 맞춰서 구조가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잡히는 게 있긴 했어요. 예전엔 아주 단순한 구조를 결정하는 것도 고민이었거든요. 근데 이 곡 이후로는 특정 소리에 적합한 구조가 무엇인지를 예전보다 빨리 찾게 된 것 같아요.

신예슬음향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곡은 어떤가요.

문석민 음향에 접근했을 땐 특수주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제는 그 주법이 새로운 게 전혀 없잖아요. 몇십 년 전에 다 해놓은 걸 가져다 쓴다는 큰 약점이 있기 때문에 소위 ‘실험적인 소리’를 써도 아무리 실험적이지 않고, 그렇게 들리지도 않는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음향적인 곡을 쓸 때는 ‘노멀한 톤’이랑 어떻게 융합시킬 건지, 실험적인 소리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주법과 어떻게 섞어서 하나의 곡을 만드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신예슬악기의 새로운 음색, 낯선 음향. 현대음악에서 많은 변화를 불러온 것들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굳이 그 악기를 쓸 거라면 그냥 그 악기에서 제일 잘 낼 수 있는 소리를 내면 안 되냐는 생각도 듭니다. 못 들었던 소리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낯선 음향에 의존하지 않고 그 악기에서 편리하게 낼 수 있는 톤으로만, 아니면 ‘음’으로만 모든 걸 컨트롤하는 식으로요.

문석민 그렇죠. 저는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대단한 작곡가라고 생각해요. 근데 그렇게 쓰는 게 훨씬 어려워요.

신예슬낯선 음향을 찾아내려는 게 가장 큰 목적이라면 그게 꼭 현대음악의 언어와 관습이어야 할까요? 생경함을 주려고 익숙한 악기를 집어 드는 일이 저는 가끔은 굉장히 의아하기도 해요. 사물로 퍼포먼스를 할 수도 있고 악기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노이즈를 적극적으로 쓸 수도 있고, 이제는 그것들이 특정 소리를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도구가 아닐 수도 있는데 왜 기본값은 대체로 동일한지, 왜 그 악기를 부여잡고 그 전통을 부여잡고 있는지. 청중 입장에선 그게 안전하고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답답하기도 한데, 곡을 쓰는 입장에서는 그 전통을 맴도는 게 지겹지는 않나요.

문석민 그렇죠 뭐. 지겨워요. 그래도 같은 걸 보더라도 새로운 걸 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다시 이것저것 보죠. 흥미가 없었던 걸 다시 볼 때도 있고. 다른 장르에선 음악을 어떻게 만드나 많이 보기도 해요. 어쨌든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거니까. 올해 11월 ATM에서 연주될 새 작품인 <Vanilla Sky>에서는 악기 연주자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로 소리를 내기도 해요. 볼펜을 클릭하는 소리, 버블 랩을 터뜨리는 소리, 음료수 캔을 찌그러트리는 소리 등. 물론 이것도 완전히 새로운 시도라 할 순 없죠.

신예슬마지막 질문은 제가 종종 저 자신에게도 던지는 답 없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언어에 비유하자면, 현대음악은 정말 몇몇 사람들만 사용하는 소수언어에 가깝고 또 그 체계도 굉장히 복잡하고 특수한 듯합니다. 이 음악만의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이 언어로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는 얘기 같기도 한데요, 이 언어로 잘 이야기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까요?

문석민 음… 없어요. 현대음악의 언어로만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는 것 같고, 그냥 음악에 기대하는 똑같은 걸 기대하는 것 같아요. 다른 체험을 하게 해주는 초월적인 가능성을 가진 매체가 음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실체가 없고 제가 쓰면서도 기대할 수 없죠. 기존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었을 때 제가 그런 경험을 한 적은 분명 있지만, 내 것을 들으면서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으로만 줄 수 있는 예술적 경험들이 있고, 저도 그걸 언젠가는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어요. 웃기죠.

신예슬왜 웃긴가요. 못 그러면서 그런 걸 꿈꾸니까요?

문석민 저는 작업하면서 듣는 사람이 특정한 예술적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확신하는 건 평생 못 할 것 같아요. 음악을 듣고 그런 엄청난 감정들을 느끼는 건 좋은데, 그런 경험을 만들어주는 건 너무 어려워요.

신예슬그래도 그런 걸 바라니까 곡을 꾸역꾸역 쓰는 거 아닐까요. 이 음악을 선택한 이유가 어딘가에는 있겠죠. 그런 경험을 이 음악을 통해 정말로, 간절히, 확신에 차서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음악계가 어떻게든 유지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뭐 꼭 그런 근사한 목표가 있다기보단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겠지, 라는 생각도 들고요.

문석민 제 경우 그런 경험을 만들어주는 게 목표는 아니고 작품이 어떤 대단한 음악 외적 의미를 갖게 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자기만족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저는 이걸 할 수 있고, 이것밖에 할 게 없고, 다른 사람들은 뭐 각자의 이유가 있겠죠. 혹시 제 작품을 듣고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면 기분이 좋을 수도 있겠네요. 나중에 근사한 목표가 생길 수도 있고요. 지금은 그냥… 하고 있습니다.

신예슬저 역시 드물지만 아주 멋진 경험을 했기 때문에 여전히 현대음악을 듣고는 있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손에 꼽고 대체로는 잘 모르겠다는 기분으로 그냥 듣고 있는 것 같아요. 모르는 채로 누군가 만든 음악을 듣다 보면 언젠가는 또 근사한 순간을 만나고, 제가 이 음악을 왜 듣고 있었는지 더 잘 알게 될까요? 긴 시간 대화 감사합니다.